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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탐방~2018
제16회 향토문화탕방 및 인성캠프 우수 탐방기
- 교양대학
- 9094
- 2017-11-13
향토문화탐방기
-선현들이 우리를 부른다.
사회복지학과 2011145035 정일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전쟁은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사유재산이 확대되고 계급이 확대될 이후부터 전쟁이 확산되었다. 전쟁은 힘의 논리에 따라 전쟁의 승자만이 모든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 가정의 가장, 어머니이자 국가의 아들, 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해야했다. 우리나라도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혼이 되었고 혼이 된 그들을 그리워하는 가족, 조국을 위해 타인을 살(殺)하여 살아남은 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고, 혹은 굴욕적인 외교를 맺기도 하였고, 조공외교를 통해 실리를 챙긴 시절이 있었으며 란(難)으로 국토의 찬란한 유산이 한 줌의 재로서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으며 나라의 주권이 빼앗겼던 치욕의 역사,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사다난한 나날 속에서 우리 민족은 끈끈한 민족정신으로 하나가 되어 광복을 일구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으며 현재 ‘원조 받는 국가’에서 ‘원조 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는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빠른 성장과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이다. 소설가인 세르반데스 돈키호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다.” 우리는 역사의 연속선상에 서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현재만을, 미래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필자는 이 태도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숨 가쁘게 달려갈 우리들에게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처럼 체하지 않게 지혜로서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자부한다. 이에 필자는 독립운동과 수 천 년간 보존해온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를 중심으로 견문을 넓히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잊혀져가던 역사를 상기시키고 교훈을 삼아 현재와 미래를 힘차게 달려가고자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지원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그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앉았고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 도착하자 선조들이 수많은 희생과 피땀 흘려 수호했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안의 찬란한 문화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운동만을 위한 경상북도 내 유일 기념관이라고 한다. 넓디넓은 경상북도에, 특히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한 이유에 대해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은 12,000여 명 중 2,000여 명이 경북, 특히 300여 명은 안동 출신 인물이라는 점에서 선비정신과 독립투쟁에 대한 열의와 자부심으로 추측해본다. 안동 출신은 아니지만 의열단, 김좌진, 안중근 등의 단체와 위인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수학하고 우수한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알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자 향토탐방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의 첫 시작은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었다. 나라가 위기와 고난에 빠졌을 때 혹자는 침묵하는데 모자라 반민족행위를 일삼았다면, 혹자는 자결과 투쟁을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치하에 대항한 용맹하며 사군자로 표현되는 선비정신의 표상이었다. 이들의 희생과 넋을 기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묵념에 임했다. 묵념 이후 필자는 ‘과연 이 당시에 본인은 어떤 노선을 택했을까?’라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일제강점기의 노예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앞잡이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독립투쟁에 대한 역사를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혼과 정신을 깨닫고 자아성찰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만이 일전의 부끄러운 생각에 대해 반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시대 흐름에 따라 독립운동을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변천사와 방법을 인물들의 이해와 영상기록물, 보존자료 등의 자료를 통하여 가독성 및 직관성을 높임으로써 갑오의병부터 시작된 안동의 항일운동사를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사 자격검정을 위해 공부했었는데 유명한 투쟁만을 공부했었기에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해 궁금함을 안고 있었는데 제천과 함께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나간 안동의 역사를 탐구할 수 있었으며 문화해설사의 스토리텔링이 안동 항일투쟁사를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이해를 높였다. 이를 통해 항일투쟁사를 복습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역사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자행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방법을 체험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잔혹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이 있어 드러나지 않았던 지역사회의 인물들을 발굴하며 재조명하게 하는 점에서 제천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도 이러한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 언급했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이상룡 선생에 대해 기억이 거의 없었기에 흥미로움을 가지고 석주 선생의 생가였던 임청각으로 이동하였다. 임청각은 부유한 집안이자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았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처하여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과 임청각마저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석주 선생의 생애와 애환이 담겨있는 장소이다.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시형, 이회형 등으로 회자되는 이항복 후손인 이씨 형제를 떠올리기 쉬운데 -필자도 그랬다.- 기념관과 임청각을 둘러보면서 석주선생도 신흥무관학교의 창립인으로서 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임청각을 바라보면서 일본이 자행한 만행에 대해 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멀쩡한 문화재에 시멘트칠을 하여 외국 문화를 강요하여 민족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왕조의 정기와 맥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건설한 총독부 건물,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기 위해 건설된 서대문 형무소가 그것이다.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문화재를 불법반출하고 파괴를 일삼았던 일본이 석주선생의 생가마저 철로를 부설하여 독립운동의 맥을 차단하고자 했다고 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문제의식을 갖고 철로를 이전하여 석주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임청각이 현대에 갖는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쉬웠던 점은 임청각 내부에 들어가 건축양식이나 고택의 향기를, 임청각에서 즐기는 선비들의 생활을 느껴보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으로 남아있다.
임청각 옆에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었는데 몇 없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전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일제의 만행이 드러난다. ‘기단부에 12지신상이 있는 것 같은데 희미하다. 시멘트가 발려있는 것 같은데... 누가 보수를 이렇게 해놨지?’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역시나 석굴암에 행했던 만행과 더불어 주변에 철도를 부설하여 붕괴의 위험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문득 무의식적으로 일본이 단순히 우리나라에 무력침략, 경제적 수탈만 자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토속문화, 민족 정체성, 사회,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생각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구역질이 났었다. 다시 한번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기념관과 임청각을 방문하여 일본이 자행한 만행, 그 속에서 피어오른 사군자와 눈부신 선비정신, 조국을 지키기 위한 선대들에 대한 무궁한 영광, 훌륭한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이후 하회마을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하회마을을 대학교 1학년 때 가본 기억이 있었다. 그당시, 시내버스를 타면서 동행한 외국의 노부부와 함께 하회마을을 방문했었다. 그렇게 좋은 기억을 안고 다시 하회마을을 방문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안동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주변을 흐른다고 하여 하회마을이라고 불렸으며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현재도 생활터전으로서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기와집과 한옥집 등 전통생활문화와 옛 건축양식 잘 보존 된 곳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을 거닐면서 조선시대의 마을에 와본 것처럼 신기했고 옛 한옥의 모습과 당시 생활상에 대해 유추해보면서 재미를 느꼈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물아일체의 삶 속에서 수학하고 자연 풍광을 벗 삼던 그 당시의 선비들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다. 아직도 1학년 때 갔었던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모습을 기억하지만 일정상 부용대에 오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고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안동에서 영주로 이동하였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한다. 선비들의 생활상을 체험하고 선비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한국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인성특강을 듣고 숙박하게 되었다. 유교하면 떠오르는 것이 공자이다. 유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공자의 생애에 대해선 거의 배운 바가 없었기에 이 특강이 의미 있는 특강이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과 현대사회에서 공자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 야간 특강을 진행해주신 수련원장께 감사함을 전한다.
다음날 선비촌을 거닌 뒤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의 최초 사립교육기관이었으며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으로 시작하여 이황의 노력으로 사액 받아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소수서원의 주변풍경에 대해 감탄하고 선비들이 ‘주변 경치가 좋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 공부도 잘 됐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문화해설사가 동행하면서 소수서원의 계곡에 있던 경(敬)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단종 복위 시도의 장이자 그로 인해 죄없던 백성까지 몰살 당해야했던 순흥도호부의 슬픈 사연을 청해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 등을 통해 후대에 전승되어 역사와 문화가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와 지역사회 내의 전통보존연구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소수서원의 다양한 건축물을 즐길 시간이 부족해 문화해설사의 해설과 개별적으로 감상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후 부석사를 방문하였다. 부석사는 화엄종을 근본으로 하여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규모의 경우이다. 부석사에도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어있었기에 부석사의 유래, 해설, 문화재, 뛰어난 자연풍광 등을 알 수 있었다. 필자도 많은 절을 다녀보았지만 부석사는 산자락에서 자연경치를 바라보는 풍경이 특히 예술이었다. 교과서에서의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구조와 팔작지붕, 처마의 곡선형태 등의 입체미를 통해 구조적인 안정감과 심리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명이 깊었으며 이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와 수준 높은 건축양식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또한 구완회 교수님이 무량수전 앞에서 들려준 의상과 선묘의 설화도 흥미롭게 청해 들을 수 있었다.
1박 2일간의 길지만 짧은 일정 속에서 항일독립투쟁사와 선비들의 정신, 문화 등을 통해 전통문화와 역사 학습 및 보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안동에서의 하루는 내게 삶을 살아가면서 ‘국가’라는 최우선 가치와 우리나라를 목숨바쳐 지켜낸 순국선열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과 잊혀져 가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찬란한 역사의 소중함, 그리고 선인들의 지혜를 기억하고 온고지신을 토대로 발전된 모습으로 후대에 전하는 무거운 의무와 책임에 대해 통감하게 되었다.
영주에서는 선비들의 정신과 한 시대를 풍미한 중국에 뒤지지 않는 유교문화, 조선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알게된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눈과 마음에 충분히 담았으므로 매우 만족했다. 향토문화탐방이 세명대학교의 대표 행사라고 생각한다. 향토탐방의 필요성과 가치를 높게 사 관심과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학교 및 관계자,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한 교양대학, 교양대학장님과 구완회 교수님 -개인적으로 탐방 내내 교수님들과 함께하며 명승지마다 좋은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 탐방의 교육적 효과를 높여주신 점과 필자를 포함하여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가장 인상 깊었고, 깊은 밤 조양루에서 2분의 교수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께 감사함을 느끼며 명승지마다 문화해설사를 배치하고, 행사진행을 도운 조교 선생님들께 감사함을 느끼며 많은 학생들이 향토문화탐방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현들이 우리를 부른다.
사회복지학과 2011145035 정일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전쟁은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사유재산이 확대되고 계급이 확대될 이후부터 전쟁이 확산되었다. 전쟁은 힘의 논리에 따라 전쟁의 승자만이 모든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 가정의 가장, 어머니이자 국가의 아들, 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당해야했다. 우리나라도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혼이 되었고 혼이 된 그들을 그리워하는 가족, 조국을 위해 타인을 살(殺)하여 살아남은 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시절이 있었고, 혹은 굴욕적인 외교를 맺기도 하였고, 조공외교를 통해 실리를 챙긴 시절이 있었으며 란(難)으로 국토의 찬란한 유산이 한 줌의 재로서 남아 있던 시절이 있었으며 나라의 주권이 빼앗겼던 치욕의 역사,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사다난한 나날 속에서 우리 민족은 끈끈한 민족정신으로 하나가 되어 광복을 일구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으며 현재 ‘원조 받는 국가’에서 ‘원조 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는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빠른 성장과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것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역사이다. 소설가인 세르반데스 돈키호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다.” 우리는 역사의 연속선상에 서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현재만을, 미래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필자는 이 태도를 비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역사는 숨 가쁘게 달려갈 우리들에게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처럼 체하지 않게 지혜로서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자부한다. 이에 필자는 독립운동과 수 천 년간 보존해온 선조들의 생활과 문화를 중심으로 견문을 넓히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잊혀져가던 역사를 상기시키고 교훈을 삼아 현재와 미래를 힘차게 달려가고자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지원하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그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앉았고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 도착하자 선조들이 수많은 희생과 피땀 흘려 수호했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안의 찬란한 문화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향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독립운동만을 위한 경상북도 내 유일 기념관이라고 한다. 넓디넓은 경상북도에, 특히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한 이유에 대해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받은 12,000여 명 중 2,000여 명이 경북, 특히 300여 명은 안동 출신 인물이라는 점에서 선비정신과 독립투쟁에 대한 열의와 자부심으로 추측해본다. 안동 출신은 아니지만 의열단, 김좌진, 안중근 등의 단체와 위인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수학하고 우수한 역사와 문화를 토대로 일제강점의 부당함을 알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자 향토탐방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의 첫 시작은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었다. 나라가 위기와 고난에 빠졌을 때 혹자는 침묵하는데 모자라 반민족행위를 일삼았다면, 혹자는 자결과 투쟁을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치하에 대항한 용맹하며 사군자로 표현되는 선비정신의 표상이었다. 이들의 희생과 넋을 기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고 묵념에 임했다. 묵념 이후 필자는 ‘과연 이 당시에 본인은 어떤 노선을 택했을까?’라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일제강점기의 노예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아니 앞잡이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독립투쟁에 대한 역사를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혼과 정신을 깨닫고 자아성찰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만이 일전의 부끄러운 생각에 대해 반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시대 흐름에 따라 독립운동을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변천사와 방법을 인물들의 이해와 영상기록물, 보존자료 등의 자료를 통하여 가독성 및 직관성을 높임으로써 갑오의병부터 시작된 안동의 항일운동사를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사 자격검정을 위해 공부했었는데 유명한 투쟁만을 공부했었기에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해 궁금함을 안고 있었는데 제천과 함께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나간 안동의 역사를 탐구할 수 있었으며 문화해설사의 스토리텔링이 안동 항일투쟁사를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이해를 높였다. 이를 통해 항일투쟁사를 복습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역사학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자행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방법을 체험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잔혹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이 있어 드러나지 않았던 지역사회의 인물들을 발굴하며 재조명하게 하는 점에서 제천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도 이러한 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 언급했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이상룡 선생에 대해 기억이 거의 없었기에 흥미로움을 가지고 석주 선생의 생가였던 임청각으로 이동하였다. 임청각은 부유한 집안이자 종손으로서의 권위를 보장받았으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의 길을 자처하여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재산과 임청각마저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석주 선생의 생애와 애환이 담겨있는 장소이다. 우리는 신흥무관학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시형, 이회형 등으로 회자되는 이항복 후손인 이씨 형제를 떠올리기 쉬운데 -필자도 그랬다.- 기념관과 임청각을 둘러보면서 석주선생도 신흥무관학교의 창립인으로서 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임청각을 바라보면서 일본이 자행한 만행에 대해 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멀쩡한 문화재에 시멘트칠을 하여 외국 문화를 강요하여 민족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왕조의 정기와 맥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건설한 총독부 건물,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기 위해 건설된 서대문 형무소가 그것이다.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문화재를 불법반출하고 파괴를 일삼았던 일본이 석주선생의 생가마저 철로를 부설하여 독립운동의 맥을 차단하고자 했다고 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문제의식을 갖고 철로를 이전하여 석주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임청각이 현대에 갖는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이쉬웠던 점은 임청각 내부에 들어가 건축양식이나 고택의 향기를, 임청각에서 즐기는 선비들의 생활을 느껴보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으로 남아있다.
임청각 옆에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있었는데 몇 없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전탑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일제의 만행이 드러난다. ‘기단부에 12지신상이 있는 것 같은데 희미하다. 시멘트가 발려있는 것 같은데... 누가 보수를 이렇게 해놨지?’라는 의문이 생겼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역시나 석굴암에 행했던 만행과 더불어 주변에 철도를 부설하여 붕괴의 위험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문득 무의식적으로 일본이 단순히 우리나라에 무력침략, 경제적 수탈만 자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토속문화, 민족 정체성, 사회,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말살시키려고 했다는 생각에 경탄을 금치 못했고 구역질이 났었다. 다시 한번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기념관과 임청각을 방문하여 일본이 자행한 만행, 그 속에서 피어오른 사군자와 눈부신 선비정신, 조국을 지키기 위한 선대들에 대한 무궁한 영광, 훌륭한 지역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이후 하회마을을 방문하였다. 필자는 하회마을을 대학교 1학년 때 가본 기억이 있었다. 그당시, 시내버스를 타면서 동행한 외국의 노부부와 함께 하회마을을 방문했었다. 그렇게 좋은 기억을 안고 다시 하회마을을 방문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안동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마을을 주변을 흐른다고 하여 하회마을이라고 불렸으며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현재도 생활터전으로서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기와집과 한옥집 등 전통생활문화와 옛 건축양식 잘 보존 된 곳이기도 하다. 하회마을을 거닐면서 조선시대의 마을에 와본 것처럼 신기했고 옛 한옥의 모습과 당시 생활상에 대해 유추해보면서 재미를 느꼈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물아일체의 삶 속에서 수학하고 자연 풍광을 벗 삼던 그 당시의 선비들이 부러웠던 시간이었다. 아직도 1학년 때 갔었던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모습을 기억하지만 일정상 부용대에 오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고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안동에서 영주로 이동하였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한다. 선비들의 생활상을 체험하고 선비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한국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인성특강을 듣고 숙박하게 되었다. 유교하면 떠오르는 것이 공자이다. 유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공자의 생애에 대해선 거의 배운 바가 없었기에 이 특강이 의미 있는 특강이었다.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과 현대사회에서 공자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 야간 특강을 진행해주신 수련원장께 감사함을 전한다.
다음날 선비촌을 거닌 뒤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의 최초 사립교육기관이었으며 조선 중종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으로 시작하여 이황의 노력으로 사액 받아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소수서원의 주변풍경에 대해 감탄하고 선비들이 ‘주변 경치가 좋고 맑은 공기를 마시니 공부도 잘 됐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문화해설사가 동행하면서 소수서원의 계곡에 있던 경(敬)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단종 복위 시도의 장이자 그로 인해 죄없던 백성까지 몰살 당해야했던 순흥도호부의 슬픈 사연을 청해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 등을 통해 후대에 전승되어 역사와 문화가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와 지역사회 내의 전통보존연구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소수서원의 다양한 건축물을 즐길 시간이 부족해 문화해설사의 해설과 개별적으로 감상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후 부석사를 방문하였다. 부석사는 화엄종을 근본으로 하여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대규모의 경우이다. 부석사에도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어있었기에 부석사의 유래, 해설, 문화재, 뛰어난 자연풍광 등을 알 수 있었다. 필자도 많은 절을 다녀보았지만 부석사는 산자락에서 자연경치를 바라보는 풍경이 특히 예술이었다. 교과서에서의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구조와 팔작지붕, 처마의 곡선형태 등의 입체미를 통해 구조적인 안정감과 심리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명이 깊었으며 이를 통해 선조들의 지혜와 수준 높은 건축양식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또한 구완회 교수님이 무량수전 앞에서 들려준 의상과 선묘의 설화도 흥미롭게 청해 들을 수 있었다.
1박 2일간의 길지만 짧은 일정 속에서 항일독립투쟁사와 선비들의 정신, 문화 등을 통해 전통문화와 역사 학습 및 보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안동에서의 하루는 내게 삶을 살아가면서 ‘국가’라는 최우선 가치와 우리나라를 목숨바쳐 지켜낸 순국선열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과 잊혀져 가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찬란한 역사의 소중함, 그리고 선인들의 지혜를 기억하고 온고지신을 토대로 발전된 모습으로 후대에 전하는 무거운 의무와 책임에 대해 통감하게 되었다.
영주에서는 선비들의 정신과 한 시대를 풍미한 중국에 뒤지지 않는 유교문화, 조선시대의 생활상에 대해 알게된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눈과 마음에 충분히 담았으므로 매우 만족했다. 향토문화탐방이 세명대학교의 대표 행사라고 생각한다. 향토탐방의 필요성과 가치를 높게 사 관심과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학교 및 관계자,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한 교양대학, 교양대학장님과 구완회 교수님 -개인적으로 탐방 내내 교수님들과 함께하며 명승지마다 좋은 이야기와 말씀을 통해 탐방의 교육적 효과를 높여주신 점과 필자를 포함하여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상호작용이 가장 인상 깊었고, 깊은 밤 조양루에서 2분의 교수님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께 감사함을 느끼며 명승지마다 문화해설사를 배치하고, 행사진행을 도운 조교 선생님들께 감사함을 느끼며 많은 학생들이 향토문화탐방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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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 2024-10-26